3. 무조건적 선택과 주권적 영벌(유기)에 대한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하는 데 사용된 구절들
이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주권적으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않을 사람을 선택하시는데 이 선택은 죄인이 행하는 일, 즉 심지어 복음에 대해 듣고 이에 대해 믿음을 발휘하는 것을 포함하는 그 어떤 것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말들을 살펴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친히 작정하심으로써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여졌다. 이렇게 예정되고 미리 운명이 정해진 천사들과 사람들(구원받는 자들)은 특별하게 그리고 불변하게 계획되어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숫자는 확실하게 정해져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가 없다.… 나머지 인류(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뜻에 따른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 그 계획에 따라 그분께서는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신다 -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해, 그들을 간과하심으로써 그들이 그들의 죄로 인한 불명예와 진노를 받도록 그들의 운명을 정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양하기 위함이다.
칼빈은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는 예정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뜻한다고 믿으며 이 작정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각 사람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셨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조건하에서 창조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에 이르도록 예정된다. 각 사람은 이 둘 중의 어느 한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각 사람이 생명이나 또는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왔다고 말한다(「기독교 강요」 3권 21장 5항,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은 주권적으로 영벌(유기)을 받는다는 쌍둥이 교리(보통 이중 예정이라고 불림)를 수반한다. 칼빈은 주권적 영벌(영원히 버림받는 것, 즉 유기)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신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결점이 없어도 오직 그분의 주권적 의지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의 운명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작정과 계획에 의해 정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모태에서부터 사망에 이르도록 태어나며 이로써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파멸로 인해 영광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자녀들로 택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절하시고 영원히 내버리신다(「기독교 강요」, 3권 23장, 하나님의 유기에 대하여).
다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지지하려고 칼빈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주요 증거 본문들이다.
① 요한복음 1장 11-13절: 그분께서 자기 땅에 오셨어도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이나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느니라.
칼빈주의자들은 새로운 출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이끄심의 문제라는 자신들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 종종 13절에 나오는 말들을 사용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사람의 뜻에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난다고 말하지 않는가? 참으로 그렇다. 그런데 앞뒤 문맥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의지(혹은 뜻)의 행위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이 의미하는 바는 새로운 출생이란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행위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의 기적이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할지어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소망에 이르게 하셨고(벧전1:3)
구원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 내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 빛을 비추시고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며 성령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구원이 사람의 의지(뜻)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는 것은 결코 사람이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림을 받고 회심하고 나서야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이 구절들은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가르치면서 오히려 칼빈주의를 반박한다.
② 베드로전서 1장 2절: [나그네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을 통해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이르도록 선택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화평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으로 해석하여 그것의 참된 의미 자체를 없애 버린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그분이 미리 보시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린다. 그러나 베드로가 ‘미리 아심’이라는 말을 쓰며 사용한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아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한 그리스어는 ‘prognosis’인데 그것은 지금도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예지’ 혹은 ‘예후’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의사가 질병에 대한 예후를 말할 때 그는 그 질병에 대한 정상적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의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미래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리 아심’의 교리는, 칼빈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 뜻을 재정의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과 사람이 택하는 것의 신비를 거의 다 설명한다. 물론 미리 아심보다는 선택에 더 많은 신비가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과정 속에 ‘그분의 미리 아심’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미리 정하심’으로 재정의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준다.
‘미리 아심’을 ‘미리 정하심’이라고 재정의한 뒤 그 말을 ‘미리 정하심’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고 시도하면서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하는 사도행전 2장 23절을 사용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 두 개는 전혀 다르다. 또한 칼빈주의자들은 ‘정하신 계획’이 ‘미리 아심’보다 선행한다고 지적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은 ‘과’(and)이다. 사도행전 2장 23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 즉 정하신 계획'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and) 미리 아심’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미리 아심에 따라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오직 자신의 정하신 계획에 따라서만 선택하신다는 뜻이 아니며 미리 아심의 과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을 열등한 하나님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③ 디모데후서 1장 9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인데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하며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하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주권적으로’ 선택받고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믿음이나 하나님이 미리 아심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엡2:8-9).
④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그러나 주께 사랑받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만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과 진리를 믿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구원에 이르는 선택이 진리를 믿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여기의 단어들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 구절은 우리가 진리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결코 이런 선택이 죄인의 믿음을 미리 보시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말하지 않는다.
⑤ 에베소서 1장 3-5절: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할지어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우리를 택하시며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들로 입양하심으로써
이 말씀은 믿는 자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말하는 중요한 구절이지만 선택을 위한 근거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단지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예정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큰 기쁨이었음을 말하며 미리 아심과 또 하나님의 선택에서 미리 아심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것에 대해서도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그분께서 친히 믿는 자들을 위해 정하신 것을 가리키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말한다.
⑥ 에베소서 1장 11절: 모든 것을 자신이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
이 구절에는 칼빈주의와 관계있는 두 가지 가르침이 있다. 첫째, 이 구절은 자신의 뜻하신 계획대로 이루시는 분, 즉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에 따라 믿는 자가 예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정이 미리 아심과 아무 관계가 없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 사람이 어떤 선택권도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둘째,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하신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에 대한 칼빈주의의 정의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기 원하셨고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 드러나듯이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의지)을 사람에게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면, 이런 사실은 이 구절의 가르침에 결코 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하신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하신다. 즉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을 가진 분이시다.
⑦ 고린도전서 1장 26-29절: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고 하나님께서 강력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은 결코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사람들만 구원하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 논의되는 부르심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시는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부르시는가에 있다. 이것은 이 구절들 앞의 말씀들을 보면 분명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선포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도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 그분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오 하나님의 지혜이시니라(고전1:21-24).
하나님께서는 지성, 철학, 기적 혹은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 사람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사람을 부르신다.
이것을 위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복음을 통해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느니라(살후2:14).
복음이 ‘모든 창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죄인에게 구원의 초청을 하심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하나의 약속된 수단, 즉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오는 사람들만 구원받으며, 전 시대에 걸쳐 성경을 믿는 교회들을 볼 때 이렇게 주님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하층 계급 출신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다. ‘겸손한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쉽게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당황하게 하셨다.
⑧ 로마서 8장 29-33절: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자신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면 이 일들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느냐?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겠느냐?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또다시 여기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그분의 선택 계획의 근본적 요소임을 본다. 그분께서는 친히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다. 따라서 여기서 핵심은 미리 아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만일 칼빈주의가 가르치는 것처럼, 미리 아심이 예정, 즉 미리 정하심과 같다면 이 구절은 ‘주권적 선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미리 아심이 예정과 같지 않다면 이 구절은 칼빈주의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 ‘미리 안다’(foreknow)에 해당되는 그리스어(proginosko)는 단순히 ‘미리 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믿는 자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받은 자’라는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나오는 그리스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그분의 예정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단어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며 또한 미리 아는 것과 예정이 로마서 8장 29-33절에서 묘사된 구원 과정에서 서로 다른 단계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누가 그리스도를 믿을지 미리 내다보시고 아셨으며 이를 기초로 해서 구원에 이를 사람들을 예정하신다. 이것이 예지와 예정에 대한 성경적 교리이다. 물론 하나님의 선택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더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이 구원 과정의 일부가 바로 미리 아심이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⑨ 로마서 11장 2-7절: 하나님께서 자신이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기록이 엘리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하나님께 중보하며 이르되, 주여, 그들이 주의 대언자들을 죽이고 주의 제단들을 파헤쳤으며 나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내 생명도 찾나이다, 하나 하나님의 대답이 그에게 무어라고 말하느냐? 내가 나를 위해 바알의 형상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노라, 하나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 현시대에도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그것이 은혜로 된 것이라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라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 그러면 결론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은 자기가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였으나 선택받은 자는 얻었고 그 나머지는 이날까지 눈멀게 되었으니
핑크나 다른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교리를 지지하려고 이 구절들을 사용하지만 이 구절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선택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 행위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구원이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일이라면 그것은 행위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이나 다른 구절들은 그런 궤변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명백하게 에베소서 2장 8-9절과 반대가 된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이 구절은 믿음이 결코 행위가 아님을 보여 준다. 로마서 4장 5절도 같은 것을 보여 준다.
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의롭다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
다시 말하지만 믿는 것은 행위의 반대이다. 즉 믿는 것은 결코 행위가 아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선택은 은혜를 받아들일 사람에게 은혜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에서 7,000명을 택하셨다고 말하지만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문맥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은혜의 선택’은 로마서 11장 7절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된다.
그러면 결론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은 자기가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였으나 선택받은 자는 얻었고 그 나머지는 이날까지 눈멀게 되었으니
이것은 일부는 구원받도록 예정되었고 나머지는 그렇게 예정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 대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은혜가 아니라 율법에 의거하여 하나님을 구했다. 이것은 9장을 보면 더 확실하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의 곧 믿음에서 난 의에 도달하였으나 의의 법을 따른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까닭이냐? 이는 그들이 믿음으로 그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처럼 구하였기 때문이라.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넘어졌느니라. 이것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0-33).
⑩ 에베소서 1장 5절: [그분께서]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들로 입양하심으로써
성경에 오직 이 구절만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부르심에 대한 칼빈주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홀로 서 있지 않다. 로마서 8장 29-33절에서 우리는 예정(미리 정하심)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 이후에 있음을 본다. 로마서의 이 구절들에 대한 위의 설명을 참조하기 바란다.
⑪ 사도행전 13장 48절: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
이 구절의 실제 문맥은 오히려 칼빈주의 신학을 반박한다. 사도행전 13장 43절은 죄인들이 복음 안에 거하도록 설득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회중이 흩어진 뒤에 유대인들과 신앙심 있는 유대교 개종자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는데 그들이 저들에게 말하며 저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니라.”
따라서 구원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주권적 부르심이 아닌 무언가가 있다. 인간의 의지가 그 문제에 포함되어 있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노력이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으려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함이라(고전9:22).
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함이라(고전9:19).
사도행전 13장 46절은 죄인들에게 복음이 제시될 때 그들이 그것을 거절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되어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먼저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너희 자신을 영존하는 생명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판단하므로, 보라, 우리는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노라.”
이 유대인들은 주권적으로 영벌(유기)에 이르도록 선택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제시하시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발휘하여 그것을 치워 버렸다.
사도행전 13장 47절은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이방인들의 빛으로 세웠나니 이것은 네가 땅끝까지 구원을 전하게 하려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매”
복음은 미리 선택받은 사람들의 집단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복음은 모든 창조물에게 선포되어야 하며(막16: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딤전2:3-4).
그러면 사도행전 13장 48절은 무슨 의미인가?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
이것은 간단히 말해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을 가진 자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롬10:13) 그분을 믿었음을 뜻한다. ‘정해진’이라는 그리스어(tasso)는 ‘순서 있게 배열하다, 지정하다. 또는 배치하다’(스트롱 사전 참조)를 뜻하며 신약 성경에서 총 여덟 번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두 번은 ‘정하다’(ordain)로 번역되었고(행13:48; 롬13:1) 다른 데서는 ‘[전념해서] 헌신하다’(addict, 고전16:15), ‘임명하다’(appoint, 마28:16; 행22:10; 28:23), ‘결정하다’(determine, 행15:2), ‘[놓여] 있다’(set, 눅7:8)로 번역되었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는,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지는가?”이고 둘째는, “왜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지는가?”이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자들만 특별히 선택해서 구원받게 하신다는 칼빈주의자들의 대답은 성경과 전적으로 배치가 된다.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다는 것이다(막16:16; 눅8:50; 요1:12; 3:13-18; 3:36; 5:24; 6:35; 6:40; 6:47; 8:24; 11:25; 12:36; 12:46; 20:31; 행8:36-37; 10:43; 13:39; 16:31; 롬1:16; 3:22; 4:5; 10:8-13; 고전1:21; 갈3:22; 딤전1:16; 요일5:13).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 전체에서 일관성 있게 드러나는 구원 과정의 순서, 즉 ‘사람이 믿고 구원받는다’는 순서이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한편 어떤 이방인들은(모든 이방인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여기서 성도 누가는 왜 이런 이방인들이 하나님 편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성도 누가가 개인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을 염두에 두었음을 보여 주는 어떤 증거도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방인들에게로 확대되고 이방인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께서는 사람의 마음 위로 운행하시며 어떤 이들은 그 영의 인도에 반응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옆으로 치워 버린다(로버트슨, 「워드 픽쳐」(Word Picture)).
사도행전 13장 48절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재진 자들”은 롬2:6-16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이다.
롬2:6 그 분께서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리니
롬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
롬2:8 다투고 진리에 복종하지 아니하며 불의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분개와 진노로 하시리라.
롬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며
롬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라.
롬2:1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
롬2:12 율법 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요,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에 의하여 심판받게 되리니
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들이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들만이 의롭다 하심을 받으리라.
롬2:14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들을 행할 때에는 율법이 없어도 이들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2:15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그들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여 주느니라.)
롬2:16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있으리라.
하나님은 은혜의 복음 이전에 주권적 선택에 의하여 구원을 예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고 양심이나 율법에 따라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정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들었을 때 당연히 기뻐하며 다 은혜의 복음을 믿었다.
⑫ 디도서 1장 1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진리를 인정함에 따라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언급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⑬ 데살로니가전서 1장 3-4절: 이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눈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우리가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셨음을 우리가 아노라.
이 구절 역시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형제들을 택하셨음을 말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문맥을 보고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
⑭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느니라.
핑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분께서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하나님의 주권」, p. 98).
그러나 핑크의 이런 ‘사적 해석’은 그 구절에 없는 것들을 그 구절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만들어진 궤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결코 그분이 어떤 사람들을 진노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믿는 자들(교회)은 7년 환난기에 쏟아질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 - 즉 7년 환난기 전에 휴거될 것 - 을 보여 주는 아주 단순한 약속이다(살전5:1-3). 문맥상 여기의 진노는 7년 환난기의 진노이다. 이 구절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죄인들은 영벌(유기)과 심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
⑮ 베드로후서 2장 12절: 그러나 이들은 잡혀서 멸망당하도록 만들어진 짐승들 곧 본능대로 사는 이성 없는 짐승들 같아서 자기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비방하므로 자기들의 부패 속에서 철저히 멸망할 것이며
핑크는 “분명히 ‘이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들 같아서 짐승들처럼 ‘잡혀서 죽도록’ 지어졌다.”라고 말한다(「하나님의 주권」, p. 99).
하지만 이 구절은 결코 구원받지 않는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하도록 만들어졌고 그래서 주권적으로 영벌(유기)을 받도록 정해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단순하게 거짓 교사들은 깨달음이 없어서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다고 말한다. 멸망되도록 창조된 것은 짐승들이지 거짓 교사들이 아니다.
이들에 대해 언급하는 베드로후서 2장 1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은 정죄받을 이단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에게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리라.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거짓 대언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피를 흘리고 죽으셨으며 이로써 이처럼 악한 사람들도 자신의 핏값으로 사셨지만 이들은 주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들에게 신속한 파멸을 가져왔다.
⑯ 유다서 4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들어 온 어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그들은 이 정죄를 받도록 옛적부터 미리 정해진 자들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니라.
핑크는 “무슨 대안을 선택한다 해도 어떤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이 정죄를 받도록 옛적부터 미리 정해졌다는 사실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 구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영벌(유기) 교리를 지지하려 한다(「하나님의 주권」, p. 99).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교리를 부인하는 교회 시대의 거짓 교사들은 노아 시대의 죄인들과 소돔 사람들처럼 구약 시대에 정죄 받았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외에 다른 의미는 전혀 없다.
이 구절의 분명한 의미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유1:5), 반역한 천사들 (유1:6), 소돔 사람들(유1:7), 그 대언했던 사람들(유1:15)에게 떨어졌던 형벌이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앨버트 반즈 노트」).
여기서 유다는 이 거짓 교사들이 영원 전부터 정죄(유기)에 이르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옛적부터’ 정해졌다고 말한다. 즉 이것은 그가 구약 성경과 또 죄와 배도에 대해 마지막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관된 경고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유다는 자신의 서신서 뒤에서 에녹이 이 마지막 시대에 대해 대언하였다고 말하면서 특별히 옛 시대의 대언자인 에녹을 거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영벌(유기)을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이런 구절의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의미는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영벌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명한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영벌(유기)에 대한 어둡고도 의심스러 우며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이 영벌(유기)은 아무리 강한 자라도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없으며 어떤 많은 손실이나 상처가 없이는 정말로 조금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유다서 4절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처럼 색욕을 가지고 유혹하는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마지막 때에 일어나므로 미리 경고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미리 무장해야 한다고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들이 처음부터 알려 주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정하셨기 때문에 정죄에 이르도록 분명히 정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분은 또한 은혜롭게도 자신의 아들을 대신 속죄 희생물로 주셨고 나아가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는다.”(요3:16)고 정하셨다.
⑰ 요한계시록 13장 8절: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
이 구절은 생명책에 사람의 이름이 더해지거나 더해지지 않는 근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구절은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영벌(유기)을 받았거나 혹은 주권적으로 구원받도록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에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단순히 이 구절은 7년 환난기에 구원받은 사람들(환난기 성도들)과는 반대로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고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⑱ 디모데후서 1장 9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요, 자신의 목적과 은혜에 따른 것인데 이 은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간단히 말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행위에서 나지 않고 은혜에 따른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이런 목적과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행위가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치므로(엡2:8-9) 따라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행위 구원에 해당한다는 칼빈주의의 주장은 무너지고 만다.
이 구절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죄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칼빈주의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구절 안에 억지로 집어넣어야 생긴다.
⑲ 요한복음 17장 9절: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즉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선택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구절은 동일한 복음서의 다른 많은 구절들과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한다.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5-1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어둠 속에 거하지 않게 하려함이라(요12:46).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대개는 문맥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건전한 성경 해석에서 문맥은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할 첫 번째 규칙일 뿐만 아니라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규칙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연구할 때 이 원칙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 17장 문맥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고 계신다. 따라서 당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 구절은 선택과 구원의 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이미 자기에게 주신 자들에 대해 말씀하신다(요17:2, 6). 그러면서 그분은 그들이 어떤 근거로 자기에게 주어졌는지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근거를 보려면 우리가 이미 언급한 요한복음의 앞부분, 즉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다. 그 복음은 ‘누구든지’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의미로 주어졌다. 모든 죄인이 복음을 듣고(막16:16) 구원받는 것은(딤전2:3-4) 예수님이 명백하게 보여 주신 그분 자신의 뜻이다.
선택에 관한 한 현재 우리가 알지 못하고 또 이 현시대의 삶에서 우리가 알지 못할 요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해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시며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딤전2:3-4).
하나님은 결코 죄인들과 말놀이 게임을 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이 선택한 자들에게만 구원을 제공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신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그는 구원을 받는다.
나는 칼빈주의를 추종하는 내 친구 중 하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크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형제님,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그러자 그는 난해하고 묘한 신학적 설명을 하려고 하면서 명확하게 “그렇습니다!”라는 답을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칼빈주의의 문제이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묻는 모든 것에 대해 답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다. 현실에서 구원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선택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형제님,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바로 이 질문에 명쾌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오류로 가득한 칼빈주의라는 인본주의 신학 체계에 의해 세뇌를 당한 사람이다. 이런 신학 체계는 성경이 알려 주는 명백하고도 단순한 가르침과 항상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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