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그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그와 함께 있는 청년들 중 두 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더라.
다섯 번째 그룹이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한다.
‘안녕하십니까?’
‘웬일이냐, 어디서 오는 것이냐?’
‘땅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내 친구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 같은 자는 지상에 없느니라. 의롭고 정직한 사람이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회피하는 사람이더냐?’
‘글세요, 저는 그런 건 모릅니다. 주께서 그를 당신의 친구라고 부르셨지요. 그렇지만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친한 친구는 못될 겁니다.’
‘아니다. 네가 잘 모르는 소리다. 아브라함은 내 친구이며, 나는 그를 신뢰하노라.’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여호와 주 하나님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저 땅에는 아브라함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2천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 겐지스 강에 자기 자식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재칼에게 쌍둥이 자식들을 던져 주기도 합니다. 저를 위해 수레바퀴를 부모들 위에 굴려 죽이는 자들도 있습니다.(인도 오리사 주의 푸리에 있는 자칸나트신 숭배) 나를 위해 참회를 하면서 등살에 채찍질을 하기도 합니다. 나를 위해 게헨나에서 아이들을 태우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를 위한 것입니다. 아마 주님께서 그런 친구를 갖고 계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내 친구이다.’
‘내기 거실까요?’
‘좋다. 그렇게 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진실한 것인가를 시험받았다. 신실한 사람은 시험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그것에 대한 시험을 받을 것이며(2절) 그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3절)
독자 여러분은 아들과 나무와 옆구리를 찌를 도구와 불을 잘 주목하라. 이 불은 출12:8와 요19:28의 어린 양을 굽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예표(유형)이다.
출12:8 또 그들은 그 날 밤에 그 고기를 먹을지니 불에 구워서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을지니라.
요19:28 이 일 후에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목마르다."고 하시니 이는 성경이 이루어지게 함이라.
아브라함은 “늙어서 얻은 아들” 즉 그의 독자를 데리고 갔다. 이 구절들의 참된 의미는 늙은 아비가 아들을 데리고 두 밤을 어떻게 지냈을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 드러나게 될 것이다. 모든 주석들을 살펴봐도 본문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과정은 이러하다.
아들과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이틀 밤을 함께 보내게 될 때 그들은 함께 천막을 치고 음식을 만들고 함께 잠을 잤을 것이다. 늙은 아비는 자리에 눕긴 했지만 눈 한 번 붙일 수가 없었다.
모닥불 사이로 영문도 모르는 채 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사탄은 일을 시작한다.
‘이봐, 저기, 자네 아들 보이지?
당신이 무릎에 앉고 키운 아이야.
걷고 말하는 것도 당신이 직접 가르쳤잖아.
첫 돌 때 모습 기억나나?
그 후에 자라면서 재롱부리던 모습도 기억하겠지?
이봐, 당신이 저 아이를 죽이다니! 그럴 수 없지.
저 아이가 죽으면 자네 후손은 어디서 나오겠나?
이제 와서 또 다른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애?’
늙은 아브라함은 몸을 뒤척이며 엡6:10-14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한 시간쯤 후 이삭이 갑자기 깨더니만 몸을 돌려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버지,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니다. 얘야, 어서 자거라.’
‘하지만 아버지 울고 계시잖아요? 어디 편찮으신 것 아니세요?’
‘아무 일도 없다. 얘야, 어서 자거라. 내일은 또 긴 여행을 해야 되니까?’
엡6:10-14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너희가 악한 날에 저항할 수 있으며 또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 서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서서 진리로 너희의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더 이상 아들에게 자기의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하나님의 친구는 일어나 모닥불을 뒤적여 불을 일구고서는 나무를 더 얹어 놓는다.
둘째 밤
이날 밤도 역시 늙은 아브라함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다. 결국 아브라함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 제 말 들리십니까? 주님, 지난 번 창16:16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다 자백 드렸습니다.
주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이번 일이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저는 맹목적인 믿음이나마 믿음대로 하겠습니다.
주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힘듭니다.’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람은 86세였더라.
이때 다섯 번째 그룹이 속삭인다.
‘포기하라, 포기해! 너는 이번 일을 이뤄 낼 수 없을 거야.
자식이 죽어 봐! 네 심장이 터지고 말걸.
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
온갖 약속을 해 놓고서 이제 와서 외아들을 달라고 하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어?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 늦기 전에 집으로 빨리 돌아가!’
아브라함은 유대평원과 언덕 위에서 그 어떤 장수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싸움을 사우고 있었다.(히12:1-3)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영적인 싸움을 싸웠다. 창세기 22장에서 그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욥과 아브라함은 인생의 현실에 관한한 권위 중의 권위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 앞에서 아무리 위대한 심리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일지라도 인생이 이렇고 저렇고 떠들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 생각해 보라.
히12:1 그러므로 이처럼 많은 구름 같은 증인들이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 또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
히12:2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3 너희가 생각이 지쳐 낙심치 않기 위하여 자기에게 저질러진 죄인들의 그와 같은 모순된 행동들을 견뎌내신 그를 깊이 생각하라.
4 삼일째 되던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있는 그 곳을 보고
5 아브라함이 그의 청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머물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경배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들어서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그는 자기 손에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경배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 표현은 분명 부활 신앙을 언급하고 있다. 욥19:25-26에서도 욥의 부활신앙이 나와 있다. RSV, ASV, 윌리엄즈역, 모팻역, 개혁한글, 개정개혁역은 욥19:26에서 모두 변개되어 부활에 대한 언급을 없애 버렸다.
(한글킹제임스성경) 욥19:25 이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훗날 그가 땅에 서실 것임을 내가 앎이라.
욥19:26 내 피부에 벌레들이 내 몸을 멸하여도 내가 내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리라.
(KJV)yet in my flesh shall I see God:(내가 내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리라)
(ASV) Then without my flesh shall I see God;(내 몸없이 하나님을 보리라)
(RSV) then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내 몸으로부터(떨어져서 나와서) 하나님을 보리라.]
(개역한글)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개정개역)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과 아브라함은 모든 성경변개자들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요8:56에서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을 인정하신다. 아브라함은 그의 청년들에게 자기와 이삭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기를 기뻐하다가 그 후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느니라.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분명 이삭을 죽이려고 했음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은 일관성을 갖고 확고한 자세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려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삭과 함께 다시 오겠다는 말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읽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의 죽은 것 같은 데서 생명(이삭)을 얻었고, 사라의 죽은 것 같음에서도 생명을 얻는 체험을 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이 죽은 후 다시 그를 일으킬 것을 믿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아예 집에서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크노벨, 라쉬, 리라, 유니우스, 칼리쉬, 머피 및 케일은 이점을 놓치고 말았다. 이들은 5절의 믿음은 무의식적인 예언 혹은 거짓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발언은 히11:19에 잘 해석되어 있다.
히11:19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다시 살리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음이라. 이로써 그는 모형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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