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창세기(24-36)

창세기 37장 12절 - 22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6. 2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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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의 형들이 세켐으로 아비의 양떼를 치러 갔는데

세켐은 헤브론으로부터 꽤 많이 떨어져 있다. 사실 그 거리는 60km나 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기거(sojourning)한다는 것이 그야말로 거주(dwell)가 아닌 기거임을 보여준다. 도단은(17절)은 세켐으로부터 북북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다.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형들이 세켐에서 양떼를 치지 않느냐? 오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하니 그가 아비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더라.

14 아비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게 부탁하노니, 가서 네 형들이 잘 있고 양떼도 잘 있는지 보고 내게 소식을 가져오너라." 하며,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켐으로 가더라.

요셉은 형들의 소식을 가져오도록 심부름 가게 된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양떼는 이스라엘이며(렘13:17) 요셉은(예수님처럼) 자기 백성에게로(요1:11-12) 보내심을 받는다.(요17:18)

렘13:17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것을 듣지 아니하면, 내 혼이 너희의 오만함으로 인하여 은밀한 곳들에서 울 것이며, 또 주의 양 무리가 사로잡혀 감으로 인하여 내 눈이 심히 울고 눈물을 흘릴 것이라.

요1:11-12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냈사옵니다.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났는데, 보라, 그가 들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무엇을 찾느냐?" 하니

16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의 형들을 찾고 있나이다. 내가 당신에게 청하오니, 그들이 어디서 양떼를 치는지 내게 말해 주소서." 하더라.

17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그들이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찾았더라.

예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찾고 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눅19:10)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말씀하셨다.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은 요셉을 멀리서 보고 그를 죽이기로 공모하며

19 서로 말하기를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이미 앞서 지적한 대로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는 놀라운 일치점이 있다.(150여 개 이상) 따라서 성경의 기록자가 성령님이 아니고 그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및 바울이 우연히 요셉의 생애에 일치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들”(field 신약에서는 밭으로 번역됨)이란 용어가 요셉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비유에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복음서의 기자들이 그리스도의 생애, 출생, 죽음만 요셉과 일치시킨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그 말씀조차도 창세기 37:15에 갖다 맞추도록 기록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 37장을 기록하신 분은 마태복음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창37:18을 “내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라. 그들이 그를 보면 존중하리라.'고 하니라. 그러나 그 농부들이 그를 보고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상속자니, 자, 그를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눅20:13-14)과 비교해 보라.

성령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들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보고 죽이기로 공모하는 이야기는 단 두 곳에 등장하는데 하나는 요셉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모세와 예수님이거나 다윗과 예수님이거나 엘리야와 예수님이 아닌가? 18절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와 요셉의 유사점은 150여 개나 된는데 성경의 40명 이상의 유력한 인물들의 인생에서 130여 가지가 예수님의 생애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이것을 의도적으로 조작됐다고 하기에는 너무하다.

40여 명의 사람들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생애와 비슷한 사건을 10여 가지 정도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조작하는 것은 혹시 가능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에서 150여 개의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하도록 조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고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

아버지가 늙은 나이게 낳은 아들로 그들의 형제들이 팔레스타인 땅의 목동이며 형제들의 비행을 아버지께 고발했다가, 결국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으나 7년 동안 굶주리는 백성들을 부양하는 제 2의 통치자가 된 두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요셉과 예수 그리스도는 1700년이나 떨어져 살았는데도 방금 열거한 모든 사항에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140여 가지에서도 서로 일치한다. 그런데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말씀을 받아들이는 대신 교회나 다른 인간의 말을 신뢰하려고 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0 그러므로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서 그를 구덩이에다 던져 넣고 우리가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리고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라." 하는지라,

사람들은 요셉의 11명의 형제들이 요셉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우리가 말하기를 ...하자”)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현대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라든가 인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라든가 혹은 여러 단체들과 지역 사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라든가 완전한 회개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더나아가 그는 순교자로서 죽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대가를 지불했다. 그는 기절했을 뿐이다 그는 약물의 영향하에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났을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성경리곡을 다시 숙고해 보자 다시 발견해 보자 다시 평가해 보자(re-thinking, rediscovering, reevaluating)라고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지만 신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목제요, 죄인들의 죄들을 대속하기 위해 드려진 피의 속죄이다.(고전1-4 벧전3:18 2:24 히9:28 10:12 롬8:3 요1:29)

고전15: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았고 그 안에 선 것이라.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하여 살림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2:24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

히9: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한번 드려지셨고, 두 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

히10:12 이분은 한 번의 속죄제를 영원히 드린 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롬8:3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요1:29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학자들은 피의 속죄를 재평가하고 재숙고할 때면 그들은 피의 속죄가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 개개인의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사실은 무시한 채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희생정신의 표현으로 왜곡시켜 버린다. 이것이 학자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요셉의 죽음에 대해 그의 형들이 거짓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거짓마라을 한다.

21 르우벤이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내려고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죽이지는 말자." 하며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피를 흘리지 말자. 그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에게 손을 대지 말자." 하더라.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해 내어 그의 아비에게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르우벤은 피를 흘리는 계획ㅇㄹ 바꿔보려고 다른 제안을 하게 되는데 이는 독자들은 동일한 시도를 했던 신약의 위대한 르우벤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코데모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요7:50-51)

요7:50-51 그때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밤에 예수께 왔던 자라. "우리의 율법이 먼저 당사자로부터 들어보고 그가 하는 일을 알기도 전에 아무나 심판하는 것이냐?"고 하니

창42:22에서 르우벤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충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르우벤이 다른 일일을 보고 돌아오는 사이에 구덩이에서 끄집어내서 팔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은 20개에 팔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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