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해/창세기(1-11)

창세기 1장 9절 - 13절

예수님 사랑합니다 2025. 3. 17. 10:40

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곳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께서 마른 곳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곳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한 곳”(one place)은 한 바닥(one leed)이란 뜻으로 국자 모양으로 솟아오른 해저의 바닥들이 다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구절에서 염두에 둘 것은 기록자가 태양계 바깥의 창조 행위를 더 이상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물은 별들이 있는 창공의 “위, 아래”에 있는 물이 아니고(창1:6-8) 새들이 날아다니는 창공의 위, 아래에 있는 물이다.(창1:20-23)

창1:20-2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생물들을 풍성히 내고,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과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더라.

<스코필드 관주성경> 편집위원회, Larkin, Pember, De Hann, Epps, McClain 그리고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이 창공(대기권 아래의 하늘)을 창1:6-8의 창공(우주, 둘째 하늘)으로 오해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실수가 고의적이란 점이다. 이들은 과학의 발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형제들을 기분 상하게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창1:9-10의 “바다들”(seas)은 창1:6-8의 “물들”(waters)과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후자는 창1:2에서 “거대한 깊음”(The Great Deep)이라고 불리고 있다. 시148:3-8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분의 역사가 셋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둘째 하늘에서 첫째 하늘로, 그리고 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148:3-7 해와 달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라. 너희 모든 빛나는 별들아, 그를 찬양하라. 너희 하늘들의 하늘들과, 하늘들 위에 있는 너희 물들아, 그를 찬양하라. 너희는 주의 이름을 찬양할지니, 이는 그가 명령하셨고 그들은 창조되었음이라. 그가 또한 그들을 영원무궁토록 세우셨으며 폐기치 못할 법령을 제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모든 깊음들아, 땅에서부터 주를 찬양하라.

1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땅 위에 풀과,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과실수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2 땅이 풀과, 그 종류대로 씨를 맺는 채소와,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씨를 가진 나무를 내더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13 저녁과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더라.

이 구절에서는 3가지 사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들은 다윈의 추종자들, 즉 William Paley(1829-1934) Jean Baptiste Lamarck(1829-1944) Robert Chambers, Lyell(1797-1875) 등의 과격한 이론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첫 번째로 식물 창조는 24시간 안에 일어났다. “날”(Day)이라는 말 대신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것이 24시간인 것을 알 수 있다. 1:8과 1:13의 날을 “천 년”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창1:15)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식물이 햇빛 없이 천 년 동안 살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15-16절에 이르기까지 아직 태양이 나타나지 않는다.

두 번째 사항은 식물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냉각 물질에서부터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물은 미행성 이론(Planetesimal Theory), 성운 가설(Nebular Hypothesis), 혹은 해진 이론(Tidal Theory)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식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막13:19)

막13:19 그 날들에는 고난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으며 그 후에도 결코 없으리라.

주님의 추종자라는 자들이 비록 주님보다 자기가 더 안다고 헛소리를 해도 쓸모없는 짓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식물을 만들어 내고자 할 경우, 당연히 “창조”는 “자연발생”(Spontaneous Generation) 또는 우주적 배종 광호(Panspermia)에 의해서 세포 모델들, 교질(colloids), 효소 그리고 바이러스 등으로부터 진화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인간만큼 똑똑하다고 겨우 인정해 주는 짓일 뿐이다.(롬1장) 창1:12의 창조는 창1:11의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결과일 뿐이다.

Ramm이 쓴 <과학과 성경에 관한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책에 보면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충실한 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소위 “점진적 창조설”(progressive creationism 전에는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불렀음 )로 창조에 관한 혼합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모순들을 해석해 놓은 잡탕에 불과한 것으로 점진적 교육과 마찬가지이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Bernard Ramm에게는 창세기 1장이 여러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 점진적인 행위들의 기록인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 창조설(유신론적 진화론)은 Zahn, Mivart, Dorlodot과 같은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전형적으로 가르치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용어들을 만들어내고 가르치는 것은 진화론자들과 타협하는 행위일 뿐이다. 진화론자들은 Jean Astruc(1684-1706)에서부터 Einstein(1879-1955)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진적 창조설은 유신론적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다. 점진적 창조설은 반공주의 대신에 제국주의를, 종교적 파시즘 대신에 카톨릭을, 타협 대신에 에큐메니칼을, 자유의 포기 대신에 협력을, 인종혼혈 대신에 통합을, 뻔뻔한 불신 대신에 신정통주의를, 술주정뱅이 대신에 만년 알콜중독자를, 부랑자 대신에 통과승객을,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불신 대신에 신적 잉태를, 거듭남의 체험 대신에 완전히 내어맡김을, 피로 씻음 대신에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에게’를, 성경 말씀의 거부 대신에 목회 심리학을, 그리고 부흥회 대신에 종교강조주간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진실을 호도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건전한 교리에 모순되는 그 어떤 것이 우리는 미혹하는 경우 그것이 과학이든 교육이든 종교이든 TV이든 잡지든 간에 성경에 어긋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본 구절에서 주목할 세 번째 사항은 하나님의 창조는 “그 종류대로” 번식함으로써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명한 독자라면 창1:11-13을 읽을 때 성경적인 조건에서 민들레가 피투니아를, 백합이 장미를, 감자가 오렌지를, 사과가 바나나를, 밀이 수박을 번식할 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잡종은 다른 종끼리 교배함으로써 나오게 되는데 Burbank(1849-1926)라는 학자는 “순종의 선택적 번식”은 분리(Segregation)가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오래 전에 입증한 바 있다. 이것은 개나 고양이의 번식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자연법칙이다. 이 상식을 모르는 자들은 찰스 다윈, 전미흑인향상협회(NACCP), 대법원, 로마 카톨릭 사제들 뿐이다.

레몬과 비슷한 Citron을 참외 곁에 심어 놓으면 참외가 레몬 빛깔을 띠게 된다. 벤탐 옥수수를 일반 옥수수 곁에 심어 놓으면 두 식물을 합해 놓은 맛이 나게 된다. 인간의 경우에 혼혈과 변이는 순수혈통보다 열등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모든 씨는 “그 종류대로” 생산하게 되어 있다.

Moffat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견해에 일치시키기 위해 “종류대로”(after his kind)를 “모든 종류의”(of every kind)로 번역함으로써 다윈과 그 일당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슬쩍 피해버리고자 했다. 사실 ‘Fruit of every kind’라고 한 것은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신학적 교리에 대한 하나의 입장 표명이다. 히브리어 “라미나”는 모팻의 번역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며 “라마나”와 “민”은 히브리어에서 분리될 수 없는 전치사로 “to and for” 혹은 “from and than”이란 뜻이다. 반면 “every”는 히브리어로 “콜”이며 본문 그 어디에도 그런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모팻의 번역은 미국표준번역(ASV 1901)과 개역표준번역(RSV 1952)의 번역 위원회가 취한 전형적인 태도요 이것은 이미 고물이 되어버린 다윈의 이론을 성경에 억지로 집어넣어 성경기록의 과학적 사실을 무너뜨리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것은 과학이나 학문이라 할 수 없으며 거짓 교리의 주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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