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이 본문에서도 여전히 “그 종류대로”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다윈의 이론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입증하는 것으로 창1:1과 더불어 교육받은 진화론자들이 성경을 미워하고 거부하도록 만드는 구절이다. 유인원으로부터 인간이 나왔다는 진화론의 가설은 쥐가 박쥐로부터 나왔다는 것만큼 비논리적이다. 소위 말하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창조’는 하나의 괴물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자연의 과정에 의도적으로 개입한 결과이다. 자연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늘 종류대로 생명은 번식되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좀 더 부연하면 자연과 우주에는 주어진 법칙의 체계가 있으며 이는 음악과 미술에도 반영되어 있다 적어도 1900년까지는 그렇다. 이 법칙의 파괴는 인간이 자신의 타락한 형상대로 하나님처럼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생활방식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을 때 저지른 행위이다.(전7:29) 이러한 무정부상태는(욥21:15) 현대의 미술, 음악, 문학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현대 사회학 이론에 생생히 반영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자생존에 의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즉 행위와 종교적 행위에 의한 구원) 이를 위해 인간은 무질서와 비이성, 자연법칙의 파괴가 용납되고 권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일 수도 있음을 입증해야만 된다.
전7:29 보라, 이것이 내가 알아낸 유일한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들은 많은 계략들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라.
욥21:15 전능하신 분이 누구기에 우리가 그를 섬겨야 하리이까? 우리가 그 분께 기도한들 무슨 유익을 얻으리이까?' 하는도다.
따라서 20세기부터는 연합(union)이라는 이름하에 이질적인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수단들을 강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연합(united)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완성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를 위해 이질적인 요소를 나누셨다. 인간은 나눔으로써 억지로 하나님을 흉내내기 시작하였다. 21세기에 있어서 교황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연합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상관이 없고 어떤 것을 포함시켜도 상관없다는 선언뿐이다. 이러한 종교 신념이 피카소, 클라인, 쿠닝, 플락 등의 그림과 스트라우스, 코프랜드,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 그리고 정신과에서 사용하는 감수성 훈련(sensitivity exercises) 등을 이끌어 가는 주된 사상이며, 기독교 협의회 및 바티칸의 주요 정책이 따르고 있는 신념이다.
26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모든 땅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니라.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직접 창조하신 본문에 다다랐다. 이 선언이 다윈의 추종자들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그들은 창1-3장을 다윈의 조상들인 원숭이의 관점에서 새로 기록하여 자신들이 원숭이와 해파리 같은 강장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상상력의 틀 속에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억지로 가두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잠깐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과학적 반론을 살펴볼 것이다. 물론 타락한 죄인들은 인간 창조의 과정을 공개적으로 기록한 만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염두에 두고 말이다.
조작된 자바인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인간은 위조된 북경인으로 대표되는 피테칸트로프스(전멸한 화석인류의 하나)로 진화론자들은 추정하는 바, 이들은 유인원과 사람을 포함하는 호미노이즈를(Hominoids) 통해 안경원숭이와 유인원에서 점진적으로 진화된 것으로 그들은 추정한다. 이 현명하고 귀족적인 순수한 혈통은 여러 교황들과 헤밍웨이 같은 자들처럼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진화해 온 것으로 추정한다. ‘나는 원래 올챙이였는데 꼬리가 줄어들면서 개구리가 되었고 그 다음은 뱅골보리수나무에서 뛰놀던 원숭이가 되었다가 지금은 박사가 되었노라. 올챙이 개구리, 그리고 원숭이 인간으로, 이 모든 것은 무계획 속에 진행된 것이니 이 모든 영광은 그 누구에게도 돌릴 수 없노라.’ 그야말로 진화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만약 당신이 진화한 인간이라면 당신은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겠는가? 그 누구에게도 감사치 못하리라(롬1:21)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며, 도리어 그들의 상상들이 허망하여지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런 엉터리 원숭이 사업을 설명해 보려고 하던 수많은 박사들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
① “인간은 그의 지성(큰 두개골)으로 인해 동물들 위에 군림해 왔다.” - 1856년에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은 현대 유럽인보다도 훨씬 큰 1600cc 용량의 두개골을 지닌 것으로 표본조사가 되었으니 현대인들이 B.C. 70,000년 이래로 계속 멍청해져 왔단 말인가(두개골 용량이 줄었단 말인가)?
② “두개골의 크기와 지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두개골이 커서가 아니고 인간의 원래적 특질 혹은 사색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었다. 도구가 먼저 왔고 다음에 이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두뇌는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 지난 100년간 모든 진화론자들은 두뇌가 먼저 발달했고 그 두뇌로 도구를 발명했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③ “그것은 두뇌도 아니고 도구도 아니다. 네안데르탈인이 원시인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커다란 두개골에도 불구하고 원숭이처럼 걸었고 초인적인 이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1924년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발견된 Australopithecus는 원숭이의 두개골보다 그다지 크지 않은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는데도(507.9cc vs 498.3cc) 1946년 후텐과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인간 이하의 동물(sub human)로 분류되었다. 어째서인가? 그가 비록 네안데르탈인과는 달리 인간처럼 걸었고 네안데르탈인과는 달리 인간의 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간이 되기에는 너무도 두개골이 작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과학자들은 지난 100년 동안 4번이나 인류의 기원에 관해 그들의 의견을 수정해 왔고 그때마다 늘상 사실들(facts)을 다루고 있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해 왔으니 도대체 누구를 속일 셈인가?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그들의 주장을 누가 믿겠는가?
* 네안데르탈인의 이는 오늘날의 형태로 생길 수 있다.(1939년 Senurik의 저서)
* Pro-Magnon인은 1975년 여전히 쇼핑을 하고 있다.
* 이제껏 측정된 것 중 가장 용량이 큰 두개골은 2800cc인데 하나는 미국상원의원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한 멍청이의 것이었다.
*원숭이(Ape and Monkey)는 원인(Ape-man)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아프리카 모든 곳에서 현대인과 옛 원숭이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데, 진화 과정상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들은 왜 살아 남지 못했는가? 원숭이가 살아남았으니 원숭이가 원시인보다 더 우수한 생명의 형태라고 하겠는가? 보시다시피 대학에 다닌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위 두개골이라고 불리는 학문을 해골 중독자들이 여전히 들고 나오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해골의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자못 의미깊다 하겠다.
이처럼 인간의 기원에 관한 모든 접근방법은 성경을 거부하는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하는 모습을 암시해 주고 있다. 어째서 두개골 하나가 없어진 인종의 것이라고 멋대로 추정하는 것인가? B.C. 4000년 이래로 이 지구상에 무려 400억 개 이상의 두개골이 땅에 묻혔는데 어떻게 해서 과학자들이 적어도 8000년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나 혹은 20개 정도의 두개골이 한 세대의 주민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똑같은 시기를 대표하는 두 개의 두개골을 갖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텐데 어째서 하나의 두개골에 8000년을, 그리고 또 하나의 두개골에 14,000년을, 그리고 또 하나의 두개골에 10,000년을 할당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런 짓으로 무엇을 하려는 속셈인가?
①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그들의 친족관계를 증명해 줄 수 있는 혈통이란 없다. 1902년 뉴톨이 행한 실험에 따르면 혈액형 가운데 가장 유사한 것은 말과 고래 그 다음으로 고래와 박쥐였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만약 당신이 처음부터 박쥐가 아니라면 박쥐는 호랑이에서 나왔어만 한다. 우연하게도 유전요소란 혈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식세포에 있다.
② 인간과 동물간의 유사점은 신체구조에서만 나타날 뿐 인간의 개체발생은 동물의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인간의 수정란도 종족의 단계들을 거치지 않는데 이는 태아의 호흡기는 늦게 발달하는 반면 두뇌가 일찍 발달하기 때문이다. 아메바, 짚신벌레, 그리고 풀라나리아 그 어느 것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의 정신적, 영적 구조에는 아무런 유사점도 없다. 가장 저급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최고의 존재에게 경배하고자 하는 반면에 최고의 단계의 동물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죽이고 그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③ 흔적기관들 역시 가지고 놀기 쉬운 장난감처럼 인간의 진화를 억지로 규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미골은 없어지면서 육체의 기능들을 통제해 주는 근육을 지탱한다. 맹장은 편도선처럼 어린시절 감염을 막아주는 기관이므로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귓불은 추운 날씨에 귀를 덥게 해주기 위해 피를 저장해둔다. 송과선은 어린시절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데 유용하며 안내각 췌피 역시 눈물의 흐름을 조절해 준다.
④ 필트다운인(Piltdown man) - Charles Dawson 1912 – 은 가짜임이 드러났고 그 유명한 네안데르탈인은 겨우 13명의 친척밖에 없었으며 그 뼈는 대부분의 경우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인(수십만 명의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고 알려져있는데)의 경우 만약 그가 정상회담 장소에 나타난다면 희한한 모습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인간이 살았었다고 입증할 만한 유일한 증거로 겨우 턱뼈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⑤ 자바인은 두개골 일부, 어금니 하나, 대퇴골 하나로 되어 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이 뼈들이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발견된 시기도 그 간격이 1년 이상이나 된다.
참으로 과학은 신통하기도 하다. 자바인이 원자탄이라도 맞았단 말인가? 어째서 그렇게 산산이 흩어져 있었단 말인가?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이 따위 사실들을 심각하게 공부하고 학위를 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럽다. H.F. Osborn교수와 T.B. Bishop씨는 자바인과 하이델베르크인은 이 시점에서도 수천 개의 두개골의 형상에서 그 똑같은 유형이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을 내려보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양측의 모든 증거들을 검토한 후 건전하고도 합리적인 다음의 결론에 도달했다. 진화가설의 허구를 입증해 주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 200년이 넘도록 살아남은 것은 그 뒤에 초자연적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다윈의 종교적 신념이었으며 이 가설을 전파한 자들은 스페인 종교 재판관들이 이단을 심판할 때 사실과 진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진화는 과학적인 이론이 전혀 아니며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붙들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다.(살후2:1-12)
살후2:1-12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앞에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일에 관하여 이제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영으로나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고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라.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서는 그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리고 나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리라. 그는 대적하는 자이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이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제 너희는 무엇이 막고 있는지를 아나니 이는 그가 자기 때에 나타나려는 것이라.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나니 현재는 막는 자가 있어 막을 것이나 그가 그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만 그리하리라. 그리고 나서 그 불법자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 멸망하는 자들 안에 있는 모든 불의의 속임수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를 보내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은 진화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어간다. 자연은 향상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을 망쳐놓고 나서 이를 다시 살리고자 애쓰고 있다. 민족들은 공동의 적을 대항해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서로 이해하는 법이 없다. 교통과 통신은 진화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개발될 뿐이다. 발명품들은 진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창작되었을 뿐이다. 우주는 통합되어 가고 있지 않다. 반대로 외부로 폭발되어 가고 있다. 당신의 기억력은 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퇴화한다. 도대체 다윈과 헉슬리는 역사, 자연, 세계 및 우주의 모든 사실들이 진화와는 정반대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도 어째서 그들의 거짓 주장은 입증해 보겠다고 나서는 것인가?
John Roach Stratton은 ‘우랴늄과 라듐은 해체되고 있다. 화학 요소 중에서 상승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수세기 전의 커다란 나무들은 식물의 세계에 있어서도 퇴화가 있을 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맘모스와 검치호랑이는 오늘날의 코끼리나 호랑이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 우월하였다. 인간의 도덕성, 영적 분별력, 진리에 대한 충실성, 유혹에 대한 저항력, 도덕적 원칙 및 기준, 윤리적 실행 및 신뢰성 등은 모든 것이 진화하지 않고 퇴화하고 있음을 가장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진화하고 있지 않다. 당신이 만약 구원 받았다면 그때는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빌1:6) 하신 것처럼 그분께서 이루실 것이다. 저절로 진화(발전)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께서 완성하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구원받자 못했다면 당신은 다른 모든 원숭이 인간들과 더불어 일생 동안 원숭이짓을 하다가 마침내 무덤으로 갈 것이요, 그때는 진화와는 반대로 적자생존에서 살아남은 벌레(구더기)들이 당신의 시체 위에 살아 남아 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Shadduck 박사에 따르면 인간은 진흙에서 낙원으로 가는 진행 과정에 있다고 하는데 이 과정은 지성인 그룹들에 의해 과대 포장되어 그 진실이 다음과 같이 호도되고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 ‘유전자는 상호 관련되어 있다.’ ‘구조는 서로 유사하다.’ ‘특질은 획득된다.’ 등등의 용어나 표현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교육을 받은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두개골을 닮은 자들은 키워내는 것일 뿐이다. 사과는 사과를 생산하고 불신자는 불신자를 생산해 낸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무로부터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욥14:4 고후5:17)
욥14:4 누가 더러운 것 가운데서 깨끗한 것을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
고후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27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
동물들은 자연발생이니 점진적 창조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 책을 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동물들이 4부 합창을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고, 종일토록 돼지에게 복음을 전하고서 그 어떤 돼지가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떻게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는가?
『자신의 형상대로』. 이 구절은 동물이 갖고 있지 않은 또 앞으로도 갖지 못할 두 가지 능력을 어째서 인간이 갖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요1:1)에서 우리는 인간의 말하는 능력을 보게 된다. “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참되며”(시119:160)에서 우리는 인간의 글쓰는 능력을 보게 된다. 어째서 참된 하나님의 참된 계시는 기록된 말씀이 책의 형태로 되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는가?(시119:89,105,130)
시119:89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세워졌나이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30 주의 말씀들이 들어가면 빛을 주며, 그것이 우매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
아무리 똑똑한 침팬지라 해도 세 살이 되도 말하기를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우둔한 아이라도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왜 그런가? 1954년 Wiener는 ‘인간에게는 내적 매카니즘이 있다.’는 말로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과학적 선언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진화론자들 즉 라이센코, 베트슨, 데브리스, 골드쉬미트, 심프슨, 드리이크, 베르고송, 미와와, 제우너, 브라우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의 체면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만 묻고자 한다. 이 내적 매카니즘이 무엇이냐? 아마 그들 중 누구도 이것을 찾아낸다든지, 시험해 본다든가, 사진을 찍는다든가, 측정한다든가, 정의를 내린다든가, 조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비록 인간은 타락한 상태이지만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에 그가 하나님과 누렸던 관계를 기억하게 하므로 그것을 되찾지 못하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한다.
『자신의 형상대로』. 그 형상은 히1:1-3, 골2장, 고후4:4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내려져 있다.
히1: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고후4:4 그들 가운데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느니라.
그 형상은 칼빈 혹은 벌콥이 정의한 대로가 아니다. 성경은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그 형상은 인격이요, 아담은 너무도 “그리스도와 닮았기”에(Christ-like)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고전15장)이라고 불린다. 이 형상은 창2:7에 더 잘 정의내려져 있다. 즉 인간에 대한 정확한 구성 특징이 묘사되어 있다.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으며』, 이 말씀은 인간이 몸, 혼 그리고 영(살전5:23)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지 않고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히4:12) 칼빈, 메이첸, 핫지, 댑니, 스트롱 및 벌콥 등이 이분설에 매달려 있는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살전5:23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 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 몸은 헬라어로 “σωμα”(소마)이고 히브리어로 “רשב”(바살)이다.
* 혼은 헬라어로 “ψυχη”(프쉬케)이고 히브리어로 “נפש”(네페쉬)이며 인간 안에
육체와 같은 모양으로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
* 영은 헬라어로 “πνευμα”(프뉴마)이고, 히브리어로 “רוה”(루아흐)이며,
성경 어느 곳에서나 영은 바람 혹은 공기로 비유된다.(겔37:9-14 요3:6-9)
겔37:9-10 그때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바람에게 예언하라. 인자야, 예언하여 바람에게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오 숨아, 네 바람으로부터 와서 이 살해된 자들 위에 숨을 넣어 주어 그들로 살아나게 하라." 하시니라. 그래서 내가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예언하였더니 숨이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살아나 그들의 발로 서니 심히 큰 군대더라.
요3:6-9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니라. 니코데모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아담의 타락 이후 구약성경에서 혼은 몸에 붙어 있다. 아담은 그의 몸 안에 혼을 느슨하게 담고 창조되었다. 만약 혼이 몸에 붙은 채로 아담이 창조되었다면 그의 육신(몸)은 아직 롬7:5의 육신(Flesh)이나 골2:11의 육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혼, 몸, 영은 마치 바람으로 가득 찬 튜브가 들어 있는 타이어와 같다. 또한 혼은 육체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계6:9-11) 혼은 완전히 타버리지 않은 채 몸의 형태로 영원히 지옥에서 탈 수 있다.(고후12:1-4) 혼은 마치 고무 튜브가 타이어에 딱 들어맞듯 이 몸에 잘 들어맞는다. 따라서 모든 혼은 각각의 다른 특질을 지닌 개인적 피조물이다. 이 혼은 Ego이며 각 개인의 “나”이다. 히브리어를 아무리 깊이 연구해도 마찬가지이다.
롬7:5 이는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죄들의 정욕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 속에서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나
골2:11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버린 것이라.
계6:9-10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여실 때 내가 보니, 제단 아래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그들이 큰 음성으로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여,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을 심판하시어 우리의 피를 갚아 주실 날이 얼마나 남았나이까?" 하더라.
고후12:1-4 정녕 자랑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지 못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을 말하리라. 내가 십사 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고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 사람이 셋째 하늘로 끌려올라 갔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끌려올라 가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로다.
오늘날까지도 학자들은 이 혼(soul)이라는 단어가 생명(life)이라는 단어와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가끔 동물들을 언급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민31:28 계16:3)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의 이론을 가지고 혼이란 땅콩 모양의 자그마한 물체로 심장 혹은 뇌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이 이론은 혼에 대한 카톨릭의 기본적인 이론이다.
민31:28 전투에 나갔던 전사들에게도 주께 드릴 공물을 징수하되 사람들이나 소들이나 나귀들이나 양떼의 오백 분의 일을 드릴지니라.
계16:3 둘째 천사가 자기 호리병을 바다에 쏟으니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어 모든 살아있는 혼들이 바다에서 죽더라.
혼 혹은 “나는 '내가 있는 자'이다”(I am that I am)는 예표상 아버지 하나님께 해당되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요1:18, 딤전6:16) 인간의 타락 후 이 혼은 사망의 몸에 붙어버렸다.(창17:9-10) 그 결과 구약 성경에서는 혼(soul)이란 단어를 몸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창19:20 17:14 레22:6 22:11 23:30 민31:28) 이 사실로 인해 러터포드 판사와 럿셀주의자(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이 몸과 같이 무덤으로 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 말씀을 이같이 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행이 되버렸다. 성경은 사람이 죽을 때 그의 혼이 몸을 떠난다고 말씀하신다. 죽은 자의 혼은 흙이 닿기도 전에 몸을 떠나버린다.
요1:18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뿐이라.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
딤전6:16 오직 그 분만이 불멸하시며,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 분께 영원한 존귀와 능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창17:9-10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너와 네 씨도 대대로 지키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네 씨 사이에 맺은 네가 지켜야 할 나의 언약이니 '너희 가운데 모든 사내아이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라.'
창19:20 보소서, 이제 이 성읍은 도주하기 가깝고 작은 성읍이니, 오, 나로 그곳에 도피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그러면 내 혼이 살리이다
창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내 아이, 곧 그의 포피의 살을 베어내지 아니한 자는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위반하였음이라." 하시더라.
레22:6 즉 그런 것에 접촉한 사람은 저녁까지 불결하며, 또 그가 물로 자기 몸을 씻지 않고서는 거룩한 것들을 먹지 못할지니라.
레22:11 그러나 만일 제사장이 자기 돈으로 어떤 사람을 샀으면, 그는 그것을 먹을 것이요 그의 집에서 태어난 자도 먹을지니 그들은 그의 음식을 먹을 것이니라.
레23:30 그 날에 어떤 일이든 일하는 혼은 누구라도 내가 그의 백성 가운데서 멸망시키리라.
민31:28 전투에 나갔던 전사들에게도 주께 드릴 공물을 징수하되 사람들이나 소들이나 나귀들이나 양떼의 오백 분의 일을 드릴지니라.
영은 바람 혹은 공기와 같은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이고(고전2:11)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전3:21) 타락 이후 영은 죽었고(창3:5-7) 따라서 그 영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마27:50-54) 구약 성도들 중에는 에녹을 제외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없다. 에녹은 예외적인 인물인데, 이는 그가 결코 죽지 않을 사람들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1:3-6)
고전2:1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
전3:21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
창3:5-7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라." 하더라.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인지라. 그녀가 거기에서 그 열매를 따서 먹고 그녀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니 그가 먹더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둘 다 열려,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의 치마를 만들더라.
마27:50-53 예수께서 다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신 후 숨을 거두시더라. 그런데,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들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으며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더라.
계11:3-6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러면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하더라. 이들은 땅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촛대니라. 누구든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들의 원수를 삼킬지니 누구든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게 되리라. 이들에게는 하늘을 닫는 권세가 있어서 그들이 예언하는 날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도 있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한 사람이 거듭날 때 “거듭나는” 것은 그의 혼이 아니라 그의 영이다.(요3:6) 이 시대에 있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치 펑크난 타이어와 같다. 그는 죽은 영을 지닌 살아 있는 육체일 뿐이다.(엡2:1-6)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죽은 몸 안에 살아 있는 영이다.(롬6:2-10)
요3:6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엡2:1-6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의 큰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함께 앉히셨으니
롬6:2-10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받은 침례에 의하여 죽음 안으로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모양으로 함께 심겨졌다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의 모양과 같이 되리라.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이는 죽은 자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셔서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주관하지 못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게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사심은 하나님께 사심이라.
“몸 혹은 육신”은 몸 혹은 육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은 육신에 대해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지만 실제 그 육신은 극복하는 데는 바울의 계시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롬6-7장) 수도원에서 육신을 지나치게 학대하자 개혁자들, 특히 칼빈이 앞장서서 아담의 성품을 “영화”(Spiritualized)시켜야 하며, 따라서 육신도 영화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신학 이론을 펼치고 나섰다. 이 신학은 필로, 판태누스, 오리겐의 신학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육신은(Flesh) 육신을 의미할 뿐이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롬7:18)라고 한 바울의 말 그대로를 의미할 뿐 다른 영적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 칼빈주의적 해석은 ‘육신은 좋은 것이지만 그 안에서 역사하는 그것이(롬7:23) 나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엉터리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디, 토레이, 피니, 선데이, 카레이, 고포스, 스터드, 리빙스톤 등과 같은 사람들의 무덤을 쳐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들의 육신(Flesh, Skin)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어떻게 이들의 육신이 썩어버렸으며 벌레가 그 육신을 먹어버렸겠는가? 당신이 덮고 있는 그 육신이 아무 문제 없다면 어째서 새로운 몸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요일3:2 빌3:20-21)
롬7:18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
롬7:23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빌3:20-2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 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그 능력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천한 몸을 그 분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키리라.
하나님의 말씀<킹제임스성경 1611>의 권위를 거부하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의 사적인 해석에 갖다 맞추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인간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혼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영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Holy Ghost)이시다. 인간은 또한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4:7-9)
요14:7-8 만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는 너희가 그 분을 알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시니 빌립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그러면 만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라.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너희와 그처럼 오랜 시간을 있었는데 네가 나를 모르겠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하느냐?
아담과 예수님은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아담은 어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붉은 갈색의 흙(히브리어로 “아담”)에서 나왔다. 인간의 몸은 14개의 화학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흙의 구성원소와 같다. 반면 그리스도는 “태어난 아담”(Begotten Son)이시며 영원 가운데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들(unborn Son)로 존재하셨다.(사9:6 잠8:22-32)
그런데 칼빈은 세르베투스(1511-1553)가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이 히1:5에 의해 창1:1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화형에 처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둘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다.(눅3:38) 하지만 아담은 그의 피를 잘못된 곳에서 얻었으며(창2:23)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 자신의 피였다.(행20:38) 이 진리를 말살하려고 거의 모든 새로운 번역 성경들이 행20:38을 변개시켰다. 모든 종교가 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불가지론자에게는 아마 하나님께서 피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 믿기 어려운 모양이다. 미국표준역본(ASV 1901)은 골1:14에서도 “피”(the blood)를 제거해 버렸음을 놓치지 말라.
사9:6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으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놀라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
잠8:22-32 주께서 태초에 일하실 때에, 옛적에 그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를 소유하셨느니라. 영원부터, 태초부터, 땅이 있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느니라. 깊은 곳들이 없었을 때 내가 났으니, 물이 솟는 샘들이 없었을 때라. 산들이 세워지기 전에, 작은 산들이 있기 전에 내가 났으니 그가 아직 땅도, 들도,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의 흙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라. 그가 하늘들을 마련하실 때 내가 거기 있었으며, 그가 깊은 곳의 표면 위에 범위를 정하실 때에도 내가 거기 있었느니라. 그가 위로 구름들을 세우시고 깊음의 샘들을 힘 있게 하셨을 때, 바다에게 그의 법령을 내려 물들로 그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게 하시며 또 그가 땅의 기초들을 정하셨을 때, 그때 내가 그와 함께 양육된 자로서 그 분 곁에 있어 날마다 그 분의 기쁨이 되었으며, 그 분 앞에서 항상 즐거워하였고 그의 땅의 거처할 만한 곳에서 즐거워하였으며, 나의 기쁨이 사람들의 아들들과 더불어 있었느니라. 그러므로 오 너희 자녀들아, 이제 내 말을 들으라. 내 길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느니라.
히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중 어느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적이 있느뇨?
눅3:38 카이난은 에노스의 아들이요, 에노스는 셋의 아들이요, 셋은 아담의 아들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느니라.
창2:23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서 취해졌음이라." 하니라.
행20:28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골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을(창2:7) 갖고 있었으나 이 혼은 잃어버린 바 되었고(lost) 결국 죄의 몸에 달라붙어 버렸다. 하나님의 엄하신 경고에 따라(창2:17) 그의 산 영은 죽은 영이 되어 버렸다. 원래 아담은 그의 창조주와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의 생각(Mind)을 함께 공유했다. 사실 오늘날 하나님의 생각은 모든 철학자들의 최고의 숭배 대상이다. 인간은 높고 고귀한 위치에서 타락하여 자기 의를 주장하는 거짓말쟁이 위선자가 되어 거저 주시는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종교적 방법과 수단으로 스스로를 구원해 보려고 하는 중이다. 이 사실이야 말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학자 교육자 그리고 지성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이유이다.
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창2:17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만약 창1-3장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그 의도가 기록된 대로라면 타락한 죄인이 되어 버린 인류에게는 저주만 남게 된다. 비록 그들이 자신이 믿는 바가 옳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따른다 할지라도 저주임에는 변함이 없다.(잠14:12) 가드너는 ‘만약 인간이 자기가 믿고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실행하고 살았는데 죽고 보니 지옥에 와 있다면 그는 누구에게 화를 낼 것인가?’라는 말을 했는데,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그는 당연히 하나님께 화를 낼 것이다. 그래서 성경께서는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마13:42)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지금도 하나님께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 그가 죽는 순간 깨어 보지 불못에 처해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을 비난할 것인지는 뻔한 일이다. 창1-3장의 진리를 성경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이교 철학자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잠14:12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이니라.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인간은 무엇인가를 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만약 인간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진실하게 추구하면 그는 ‘목표를 이룰 것이다.’라는 것이요 둘째는 그들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목표를 달성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불교, 도교, 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은 목표수행에 적절히 못한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창1-3장이 옳다면 잃어버린 한 ‘형상’을 되찾기 때문이다. 가르침, 기도, 업보(karma)제거, 물레잦기, 염주 굴리기, 황금률 실천하기, 성체받기 등 그 어떤 것도 장난감 종교일 뿐이다. 성경은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고 말한다.(엡2:1-3)
엡2:1-3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따라서 타락한 형상을 되찾는 새로운 출생이 없이는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일 뿐이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학체계는 칼빈주의와 마찬가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패한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골2:8) 이들은 서양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만약 인간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 대신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가르침을 잘 믿고 따르면 그는 자기의 믿는 체계에 부합되도록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철학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 로마 카톨릭이다. 오늘날도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전히 이 원칙하에 움직이고 있다.(마16:16-18)
골2:8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
마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너에게 나타낸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니라. 나도 너에게 말하노니,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성경에서부터 종교체계를 발전시켜 보려는, 곧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대치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들의 예정된 목적지인 지옥으로 귀착될 것이다.(벧전2:8 벧후3:16) 왜냐하면 인간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지 않고서는 다윈과 헉슬 리가 상상했던 그대로 동물일 뿐이다.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한 가지 면에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새로운 출생을 거부한다면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은 교육받은 원숭이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벧전2:8 또 실족하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느니라고 하였으니 곧 불순종함으로 말씀에 실족하는 자들에게니라.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기로 정해진 것이라.
벧후3:16 그의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는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 무식한 자들과 견고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니라.
이 구절 역시 진화론자들에게는 두개골이나 화석 문제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를 던져 준다. 도대체 性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단세포 동물은 성의 구별이 없고 그 어떤 성으로로도 발전되지 않는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갖 것을 꾸며내고 발명해 내야만 된다. 성경에 답이 있는데도 그들은 '제발 그 책만은 들먹거리지 말아 달라. 그 어떤 엉터리 같은 이론도 좋지만 그 책만은 제발 언급말아 달라'고 말한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How Life Began>라는 책을 살펴봄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현대 과학 연구의 정체를 살펴 보도록 하자. “최초의 세포가 창조되기 전 어쩌면 수십억 년 전쯤일텐데, 여러 번에 걸친 시험과 실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 여러 단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원형질 분자들이 중간적 형태로부터 발생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분자들은 그 어떤 과정을 통해 스스로 번식을 하게 되었고 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이들은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구분짓는 경계선 근방에까지 도달했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들이 최초의 ...”
도대체 이따위 이론을 박사라고 하는 분들이 제시하다니 이것이 지름길인지 우회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상상에 불과하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 어떤가 보자. “최초의 세포가 창조되기 전, 이 창조는 아마 하나님 자신에 의해 되었을 것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셨을 것이다. 그분들이 계셔서 창조를 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창세기 기록은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세가 기록한 그대로가 사실일 것이다.”
위의 이론과 지금의 추정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보라. 도대체 첫 번째 주장이 두 번째 것보다 더 과학적이고 낫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진화론자들마저도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 않는가? 즉 생명이 물에서부터 나왔고 식물은 인간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이다.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증거가 창세기 기록을 확인해 준다고 인정한다면 그들 스스로의 주장을 확인해 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규조와 아메바는 성이 없으며 더군다나 두 개 혹은 세 개의 세포로 된 동물은 이제껏 존재해 본 적이 없다. 단세포 동물과 다세포 동물과의 차이는 최초의 박테리아가 거대한 뇌룡에게 독감을 옳긴 이래로 존재해 오고 있는 진화의 틈새이다. 이것은 절대불변의 진리로 아무리 용어를 바꾸는 꾀를 써봐도 이 진리를 변개할 수는 없다.
성구별이 없는 단세포 동물은 열을 가해도 압력을 가해도 습도를 바꿔도 절대로 스스로 양성의 두 개의 세포를 가진 동물로 진화하지 않는다. 당신 평생을 바쳐 이 실험을 해봐라. 두 개의 세포를 가진 동물이 단세포 생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결론은 얻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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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8절 - 31절 (0) | 2025.03.21 |
창세기 1장 20절 - 23절 (1) | 2025.03.19 |
창세기 1장 14절 - 19절 (1) | 2025.03.18 |
창세기 1장 9절 - 13절 (3) | 2025.03.17 |